유래 : 대학골에 은행나무 노송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은행나무 아래에 학이 많이날아 와선 한 여름을 보내고 훌쩍 떠나가곤 하였다.
은행나무가 많아질수록 학은더욱 많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잘되었다. 그래서 마을도 대학골이라 불렀었다.
그런데 어느 한 해 몹시 가물었을때 일이다. 학이 머무르는 들에 물이 마르고 학은 물을 마시기 위해 샘근처까지 날라오곤 했었다. 학이 사람이 마시는 우물 근처에 온다고 학을 쫓던 한
심술궂은사람이 손에 들었던 도끼를 샘 근처에서 학떼에게 던지자 학 한 마리가 도끼를 맞고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다.
학이 죽어 쓰러지자 학떼들은 갑자기 하늘로 한참선회하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를 높이 내면서 마을을 한참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후 부터 한 마리의 학도 날아오지 않았다.
학이 죽은 그 해, 이웃마을엔 비가 와서 그래도 그럭저럭 농사를 지었지만, 이 마을은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극심한 곤궁에 허덕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마을에 있는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에 풍년이 들게해 달라는 애원 섞인 제사였다. 그러자 다음 해부터 마을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학을 아끼고 은행나무를 아끼는 마을로 변했다.지금도 은행나무가 있는데 대학골 또는杏亭이라고 부른다.
유래 : 마을 뒷산의 지형이 생겼다 하여 처음은 멍덕이라 불렀다. 그 후 마을에선 덕망이 많은 사람이 많이 태어났으며, 조선시대 초엽엔 이 고을에서 林川 군수가 나왔다. 고장에선 가장 높은 사람이 나왔다고 기꺼워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더지체가 높고 덕망이 높은 분이 나와야 한다고 마을을 망덕이라고 고쳐 부르게되었다 한다.
유래 : 山形이 배(舟)의 모양 같고, 배의 형체가 또한 돛과 닻의 형체까지 있어 보이는모습으로 그 배가 선창에 맨 것 같이 생겼다 하여 배명골이라 불렀다.
세월이 흐름에따라 風水꾼들이 말하기를, 이 마을이 잘 되려면 지형을 완연한 배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산의 형체를 잘라야 한다고 해서 산의 형체를 바꾸기 위해 산형을 잘랐다 한다.
그래서 산형을 자른 지점에 마을이 생겨 여기는 배자른골 또는 잣나무골이라 부른다. 그 후 마을에 배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어배나무골, 배명골 또는 배나무골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유래 : 옛날 한 노인이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황당 근처에서 쉬면서 담배를 피우고돌아서서 한참 걸어가다가 뒤돌아 보니 자기가 담배를 피우던 자리에서 불이 나서잠깐 사이에 산제당이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 수 년이 지난 후 불탄 산제당자리에 느티나무 싹이 트기 시작했다.
느티나무는 잠깐 사이에 자라서 몇 년 후에는큰 나무로 자랐다. 느티나무가 자라남에 따라 마을엔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 했다.산제당 자리에 싹튼 느티나무가 저렇게 빨리 크는 것은 산신의 조화이므로 그 느티나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구정물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느티나무에 구정물을 주기 시작했다. 구정물을 주면 나무는 무럭무럭자라고, 시들했던 나뭇잎도 파릇파릇해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 우환이있거나 자기 소원이 있으면 구정물 한 동이를 마련하고 느티나무에 가까이 가서 구정물을 나무에 뿌리면서 자기의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구정물을 이 나무에 뿌리면 마을에 어려운 일이 없어진다해서 꼭꼭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구정물골이라고도 부른다.
유래 : 산 봉우리가 둥근 산인데, 산이 곰처럼 생겼고 앞의 산이 또한 두리두리하 게생겼다. 옛날엔 곰나루 부근에 살던 곰이 여기까지 내려와서 새끼를 낳고 살았다한다. 산봉이 둥글다 해서 원봉이라 부르는 산이다. 산 아래 마 을이 있는데, 이마을도 산명에 따라 圓峯이라 부른다.
위치 : 옛날에 큰 절터가 있었던 마을이라 해서 절골 또는 寺谷이라 부른다. 이 곳에 정공주의 묘가 있다고 한다.
유래 : 광명리에 목씨와 무안 박씨가 나누어 살았는데, 서로의 경계지역에 아주 좋은 묘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묘자리를 가지고 목씨와 박씨가 서로 싸움을 계속 했었다고 한다.
그런 싸움을 하기를 30년, 정공주라는 사람이 공주원으로 오게 되었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정공주라는 사람이 공주원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묘자리를 가지고 서로 싸우지 말고, 자신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공주가 그묘자리를 얻어 그 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