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역사인물 정규한(鄭奎漢, 1751~1824) 선생은 계룡산 자락의 계룡면 화헌리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수기치인에 힘쓴 사림(士林)이자 19세기 공주의 대표적인 학자로 본관은 장기(長鬐), 자는 맹문(孟文), 호는 화산(華山)·운수산인(雲水山人)입니다.
선생은 어린 시절 성리학자로 유명한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송환기는 송시열의 5대손으로 송시열의 학문이 선생에게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송시열의 학맥 : 우암(송시열)―수암(권상하)―남당(한원진)―운평(송능상)―성담(송환기)
1780년(정조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위한 공부가 성리학 연구를 방해한다고 하며, 그 이상 과거준비는 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만 정진하였습니다./li>
학문과 덕을 겸비한 선생은 지역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인근 지역에서는 선생에게 배우려는 선비가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화산(계룡면 화헌리) 아래에 화산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독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향약절목』을 지어 지역의 여러 사족과 함께 향약(鄕約)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효도와 공경을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강조하며, 선(善)에는 상을 주고 악(惡)에는 벌을 줌으로써 풍속 교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1790년(정조 14) 성균관에서 임금이 직접‘학(學) ’을 제재로 글을 짓게 했는데 정규한의 글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해‘은거를 스스로 예찬한 시 ’, ‘포은 정몽주의 우국충절을 읊은 시 ’등 총 264수의 시문을 저술하는 등 ‘송환기의 문하 500인 중 제일’이라는 말을 들만큼 당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1824년(순조 24) 74세의 일기로 선생이 타계했을 때 평소 바른 행실과 높은 학문으로 존경받았던 삶을 증명하듯 상복을 입은 지인이 85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묘소는 화헌리에 있으며 선생이 타계한 8년 후인 1832년(순조 32)에 문인과 후손들에 의하여 묘소 앞에 위패를 모신 화산영당(華山影堂)*이 창건되었으며, 1858년(철종 9)에는 정해명 등 공주 유생들의 상소로 사헌부 지평의 벼슬이 증직되었습니다. * 화산영당 : 정규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1832년 창건되었다. 이후 3차례(1871, 1931, 1961) 중수되었으며 매년 가을 제향을 지내고 있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저술로는 문인과 후손들의 추숭활동을 통해 1830년(순조 30) 문집인『화산집(華山集)』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주시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스스로의 수양에 힘쓴 공주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규한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21년 1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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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월의 공주 역사인물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화산 정규한 1751~1824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정규한 1751~1824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계룡산 초야에서 수기치인에 힘쓰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2021 1월의 공주역사인물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정규한 1751~1824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계룡산 초야에서 수기치인에 힘쓰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정규한 1751~1824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시행하여 효도와 공경의 도리를 강조하고 풍속을 크게 교화시켰다.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정규한 1751~1824 정규한의 시문은 1830년 후손들에 의해 발간돈 화산집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정규한 1751~1824 1832년 화산영당을 건립하여 전규한을 기리고 있으며, 1892년에 사헌부 지평의 벼슬을 증직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