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는 2019년 9월의 역사인물로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무령왕(武寧王, 462년~523년, 재위: 501년~523년)을 선정하였습니다.
무령왕은 백제의 제25대 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 키는 8척에 용모가 늠름하였고,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이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506년에는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나라의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510년에는 령을 내려 제방을 쌓고 유식자들이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백성들의 삶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512년에는 가야의 영토였던 섬진강 유역으로 비정되는 상다리 · 하다리 · 사타 · 보루 등 4현을 합병하고, 기문 · 대사지역에도 진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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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기 전성기를 이룬 “백제 25대 왕” 무령왕. 무령왕은 동성왕의 뒤를이어 40세때인 501년에 즉위하여 23년간 재위하였다. 키는 8척이며 용모가 늠름하였고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여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북방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523년 62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2년 뒤인 525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공주시 로고, 2019.09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무령왕 동상 사진/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늠름하였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좌평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동성왕 23년,501년) -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무령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고 즉위하였다. 이로 인해 무령왕은 재위 초기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역사적 무령왕의 통치경로 지도사진/대내적으로 담로제의 시행으로 체제를 정비했으며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등 민생 안정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한강 유역 회복에 주력하고 북방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했다.
외교적으로 대중국, 대왜 관계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무령왕릉은 전축분으로 중국 양나라의 대표적인 표제이며, 왕릉에서 출토된 중국제 유물들은 두 나라의 교류관계를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유물사진
무령왕릉과 유적발굴 사진/무령왕은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년) 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왕릉의 지석에는 능의 축조연대와 함께 사망 시의 무령왕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무려오앙릉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송산리 고분군에 포함되어 있다.
462~523 무령왕 - 무령왕은 동성왕의 뒤를 이어 40세때인 501년에 즉위하여 23년간 재위하였다. 키는 8척이며 용모가 늠름하였고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여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사회·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북방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523년 62세를 일기로 승하했으며, 2년뒤인 525년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