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역사인물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柿木洞)*에서 태어난 조선의 개혁을 꿈꾼 개화사상가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입니다.
* 감나무골(柿木洞) : 김옥균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로 김옥균 선생의 생애비가 있다. 화재로 인해 모두 없어졌다. 1976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3호‘김옥균 선생 유허’로 지정되었다.
김옥균은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22세이던 1872년(고종 9)에는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0여 년간 사헌부·홍문관·사간원 등의 주요 요직을 거치는 등 30세 이전에 중견관료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대문물과 제도를 수용해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화사상이 발아하고 있었는데, 김옥균 역시 1869년 박규수*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 박규수 : 북학파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사상의 시조격인 인물. 개항의 필요성을 일찍 깨닫고 선진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음.
개화당의 당수가 된 김옥균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그들의 후원을 업은 집권세력의 개화정책으로는 조선의 봉건체제를 근본적으로 혁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며,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주목하여 조선에서의 정변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884년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사들이 철수하자 이를 기회로 생각한 김옥균은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수구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확고한 세력 구축없이 일으킨 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으로 인해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하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망명 중 청나라를 이용해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뀐 김옥균은 1894년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의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청나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홍장을 만나기 전 그 곳에서 홍종우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청나라에 의해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으며, 시신 조각은 8도에 보내져 효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후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 김홍집과 서광범의 상소로 인해 죄가 사면되고 복권되었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 및 충달(忠達)의 시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묘지는 일본 도쿄에 지인들이 그의 머리카락과 유품을 묻은 곳이 2곳 있으며,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묘는 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으로 1914년 그의 양자가 일본 묘지에서 머리카락 일부를 가져와 매장한 곳입니다.
공주시는 김옥균과 관련된 유적인 김옥균 선생 유허 보존 및 정비를 위해 안내판 설치와 문화재 보호구역을 추가 지정하였고, 체계적인 유허지의 복원 및 정비사업 추진을 위한 종합정비 계획을 수립할 예정입니다.
공주시는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나 조선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외세를 물리쳐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옥균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21년 2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2021 2월의 공주 역사인물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개화사상가 김옥균 1851-1894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김옥균(金玉均), 김옥균은 1851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에서 태어나 조선의 근대적 개혁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김옥균, 1875년 조선은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운양호 사건 : 1875년 일본 해군의 운양호가 조선의 해안 탐사를 방자해 강화도를 습격한 사건, 강화도 조약 : 일본이 운양호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게 물으며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게 하기 위해 맺은 불평등 조약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김옥균, 이 무렵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가진 인물들과 자주 만나 근대화와 함께 조선을 자주적이고 부강한 나라로 건설하고자 하였다. (개화사상을 가진 김옥균의 지인들 사진)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제공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김옥균, 1884년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개화파 인사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으며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김옥균, 김옥균생가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13호 '김옥균선생유허'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