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으로 1341년(충혜왕 복위 2) 공주목 석탄*에서 태어났습니다.
* 1914년 공주군 반탄면 서원리에서 부여읍 저석리로 편입되었음.
선생은 1360년(공민왕 9) 과거 급제 후 수원에 있던 경기관찰도의 서기(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으며, 정몽주, 정도전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신진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을 교류하였습니다.
1366년(공민왕 15)에는 임금의 과실에 대해 간언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아 언로의 책임을 맡는 언관직인 우정언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공민왕의 신임을 받던 개혁적인 승려 신돈은 공민왕의 믿음에 부합하여 여러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이후 권력에 취해 노골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돈의 행태에 대해 어느 누구도 비판하지 못하였지만 선생은 언관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신돈의 잘못을 논죄하기 위한 상소문인「논신돈소(論辛旽疏)」를 작성한 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추(鄭樞)와 함께 공민왕에게 올렸습니다.*
* 상소문과 함께 당시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시조「구름이 무심탄 말이」를 지었음.
구름이 무심탄 말이
이존오(1341~1371)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이셔 임의(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光明)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상소문을 본 공민왕은 이에 격노하여 상소문을 불태운 후 그들을 심문하라 명하였고 겨우 죽음을 모면한 선생은 전라도 장사(지금의 고창)의 감무(監務)로 좌천되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고향인 공주목의 석탄으로 물러나 석탄정(石灘亭)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나라에 대한 근심과 분한 마음을 못이겨 깊은 병에 걸려 1371년(공민왕 20) 31세의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공민왕은 선생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하여 선생의 충성심을 기렸으며, 공주 충현서원, 부여 의열사 등 여러 곳에 배향되었습니다.
저술로는 1726년(영조 2) 후손들에 의해 문집인『석탄집(石灘集)』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좌천 이후 자신의 처지를 백제의 멸망에 빗대어 읊은 시「석탄행(石灘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주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관으로서 책임을 다한 이존오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21년 4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2021年 4월의 공주 역사인물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석탄 이존오
2021年 4월의 공주 역사인물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 이존오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1341년 공주목석탄에서 태어났다. 1360년 과거에 급제하여 언관인 우정언에 올랐다.
2021年 4월의 공주 역사인물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 당시 국정을 맡은 신돈이 권력을 남용하자 잘못을 논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공민왕은 상소문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이존오를 좌천시켰다.
2021年 4월의 공주 역사인물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며 '석탄정'을 짓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나라에 근심과 분한 마음을 못이겨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2021年 4월의 공주 역사인물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 공민왕은 이존오의 충성심을 기려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하였으며 공주 충현서원에 봉향되어있다.
2021年 4월의 공주 역사인물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 사후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공주 충현서원에 봉향되었다. 17.26년에는 시문집 [석탄집]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