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역사인물 동성왕(東城王, ? ~ 501, 재위 : 479 ~ 501년)은 백제 제24대 왕으로 혼란했던 웅진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여 무령왕으로 이어지는 백제 중흥기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말다(末多)·마제(麻帝)·여대(餘大)라고 하며,『삼국사기』에 의하면 제22대 문주왕의 동생이 곤지(昆支)의 아들로 태어나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과 삼근왕의 재위기간이 만 2년이었던 것에 비해 동성왕이 23년 간 재위할 수 있었던 것은 혼란했던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국내 정세의 안정을 위해 동성왕은 금강 유역의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기존 귀족세력과의 균형을 도모하였으며, 지방 곳곳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하는 등 적극적인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고 백제의 옛 위상을 되찾기 위해 중국 남조의 남제 및 왜와의 외교를 강화하였으며, 신라와의 혼인동맹을 통해 제나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동성왕의 대·내외적 정책을 통해 백제는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고 국력을 회복하였으며, 회복된 국력은 무령왕으로 이어지는 백제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궁궐과 성벽을 중수하고 왕성 안에 임류각을 축조하였으며, 제민천에 웅진교(지금의 대통교)를 가설하여 백성들을 홍수로부터 구제하고 왕도를 확장시키는 등 오늘날과 같은 공주원도심의 풍경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권 강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과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민심은 점차 악화되었는데, 결국 동성왕은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사비성 서쪽 벌판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동성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동성왕이 축조했다는 임류각은 1980년 공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그 터가 발굴된 이후인 1993년에 복원했습니다.
동성왕은 비극적인 결말로 인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혼란했던 웅진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여 무령왕으로 이어지는 백제 중흥기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서, 공주시는 동성왕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2020년 9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2020 9월의 공주 역사인물 백제중흥의 기반을 다지다 동성왕 미상~501 - 공주시
동성왕은 백제 제 24대 왕으로 이름은 모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 22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신흥 귀족을 등용시키고 신라와의 협력을 강화하여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백제를 안정시켰다.
더불어 대규모의 토목 건축공사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왕도로서의 위엄을 다졌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20년 (498) 웅진교를 가설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또한 "동성왕 22년(500)에는 왕궁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5장(丈)이었으며,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공산성에 있는 임류각은 1993년 복원한 것이다.
동성왕은 혼란했던 웅진백제를 안정시켜 무령왕대에 갱위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백제중흥의 초석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