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역사인물 류근(柳根, 1549 ~ 1627) 선생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경세가이자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충청감영을 공주로
이전·설치하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은 인물입니다.
선생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고산(孤山)으로 1596년(선조 29), 1602년(선조 35) 두 차례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1603년(선조 36) 공주로 충청감영을 이전·설치하게 되면서 공주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572년(선조 5)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윤, 대제학, 예조판서 등 지방직과 중앙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외교 분야에서도 여러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부임하여 명나라로부터의 군량미 수송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596년에는 무너진 쌍수산성(雙樹山城)을 다시 세우고 방어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공주에 군영 설치를 추진하는 등 목민관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1602년 다시 한 번 선생을 충청도관찰사로 임명하며 충청도를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선생이 이미 한 차례 충청도관찰사로 임기를 마친
경험이 있어 민심을 수습하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충청도관찰사 임기를 시작한 선생은 우선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의 본영을 공주로 옮길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습니다. 일찍이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공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정으로부터 감영의 이전·설치에 대한 허락과 함께 공주목사를 겸직하라는 명을 받은 선생은 1603년과 1604년(선조 37) 두 해에 걸쳐 쌍수산성을 보수하고 충청감영인
쌍수영과 공북(拱北)·진남(鎭南)이란 문을 세워 공주의 충청감영을 열게 되었으며, 공주는 호서의 중심 고을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호서 지역의 전세(田稅) 감면을 조정에 요청하는 등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충청도관찰사의 임기를 마친 선생은 대북파의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괴산으로 내려가 조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扈從)하던 중 통진(通津, 現 김포시)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문집으로는「서경집(西坰集)」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錄勳),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96년(숙종 22) 조정으로부터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습니다. 이후
고향인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공주시는 조선중기 문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경세가이자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충청감영을 공주로 이전·설치한 문정공 류근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2년 11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공주에 감영을 설치한 충청도 관찰사 서경 류근
선생의 본관은 진주, 자는 회부, 호는 서경, 고산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외교 분야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1596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공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두 번째 충청도관찰사 재임 시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의 본영을 공주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이전하였다.
선생은 1603년 부터 두 해에 걸쳐 쌍수산성을 보수하고 충청 감영인 쌍수영과 공북문 진남문을 세워 공주의 충청 감영을 열었으며, 이후 공주는 호서의 중심
고을로 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호서 지역의 전세 감면을 조정에 요청하는 등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627년 별세하였으며, 문집으로는 서경집이 전해지고 있다. 1696년 조정으로부터 문정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고향인 괴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