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역사인물 황신(黃愼, 1562 ~ 1617) 선생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조선의 국운을 걸고 조선통신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공주 지역*을 고향으로 삼은
창원황씨의 공주 지역 입향조인 인물입니다.
현재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일원으로 1914년 조선총독부의「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공주군 반탄면 서원리에서 편입되었음.
선생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이며 1601년(선조 34) 스승인 성혼이 비난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한 후 공주목 창강(倉江)으로
낙향하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588년(선조 21)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사헌부 감찰, 전라도관찰사, 공조·호조판서 등 지방직과 중앙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선생은 특히 임진왜란 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전쟁 초 병조정랑으로 임명되어 병조판서 이항복을 도와 군사 실무를 전담하였습니다.
1594년(선조 27)에는 강화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명나라 장수 심유경 일행을 따라 조선통신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 중 일본에 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모두 조선통신사 임무를 피하였는데, 선생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통신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강화를
반대하는 조선의 입장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종전 후인 1601년 스승인 성혼이 비난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한 후 공주목 창강으로 낙향하였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호조판서로 임명되어 전후의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고 전국적인 양전(量田)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구획을 정비하는 등 경제 정책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모신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임명되었으며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613년(광해군 5)
일어난 계축옥사 때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어 1617년(광해군 9) 별세하였으며, 이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1629년(인조 7) 공주목 창강서원(滄江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조정으로부터 문민(文敏)의 시호를 하사받았습니다.
문집으로는 조선통신사 임무 수행 중 기록한『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와『추포집』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주시는 조선중기 문신으로 조선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조선의 국운을 걸고 조선통신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공주 지역을 고향으로 삼은 창원황씨의 공주 지역 입향조인 인물인
추포 황신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2년 12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선생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이며 1601년(선조 34) 스승인 성혼이 비난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한 후 공주목
창강(倉江)으로 낙향하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588년(선조 21)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사헌부 감찰, 전라도관찰사, 공조·호조판서 등 지방직과 중앙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선생은 특히 임진왜란 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전쟁 초 병조정랑으로 임명되어 병조판서 이항복을 도와 군사 실무를 전담하였습니다.
1594년(선조 27)에는 강화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명나라 장수 심유경 일행을 따라 조선통신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 중 일본에 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모두 조선통신사 임무를 피하였는데, 선생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통신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강화를 반대하는 조선의 입장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종전 후인 1601년 스승인 성혼이 비난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한 후 공주목 창강으로 낙향하였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호조판서로 임명되어 전후의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고 전국적인 양전(量田)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구획을 정비하는 등 경제 정책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모신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임명되었으며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613년(광해군 5) 일어난 계축옥사 때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어 1617년(광해군 9) 별세하였으며, 이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1629년(인조 7) 공주목 창강서원(滄江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조정으로부터 문민(文敏)의 시호를 하사받았습니다.
문집으로는 조선통신사 임무 수행 중 기록한『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와『추포집』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의 공주 역사인물공주시 로고조선의 국운을 걸고 조선통신사 임무를 수행하다 추포 황신
선생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이며 1601년(선조 34) 스승인 성혼이 비난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한 후 공주목
창강(倉江)으로 낙향하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588년(선조 21)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사헌부 감찰, 전라도관찰사, 공조·호조판서 등 지방직과 중앙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선생은 특히 임진왜란 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전쟁 초 병조정랑으로 임명되어 병조판서 이항복을 도와 군사 실무를 전담하였습니다.
1594년(선조 27)에는 강화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명나라 장수 심유경 일행을 따라 조선통신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 중 일본에 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모두 조선통신사 임무를 피하였는데, 선생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통신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강화를 반대하는 조선의 입장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종전 후인 1601년 스승인 성혼이 비난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한 후 공주목 창강으로 낙향하였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호조판서로 임명되어 전후의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고 전국적인 양전(量田)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구획을 정비하는 등 경제 정책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모신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임명되었으며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613년(광해군 5) 일어난 계축옥사 때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어 1617년(광해군 9) 별세하였으며, 이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1629년(인조 7) 공주목 창강서원(滄江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조정으로부터 문민(文敏)의 시호를 하사받았습니다.
문집으로는 조선통신사 임무 수행 중 기록한『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와『추포집』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